본문 바로가기

독서/정의란 무엇인가 - 마이클 샌델

[정의란 무엇인가] 2. 최대 행복 원칙 - 공리주의

 

 

정당한 식인?

두번째 장 역시 딜레마 사례로 시작한다.

네 사람의 선원이 배가 난파되어 구명보트에서 표류를 하고 있다. 식량은 진작 동이 났다. 그 중 한 명이 허기와 갈증을 이기지 못하여 끝내 바닷물을 마셔버린 탓에 병이 들어 냅두면 곧 죽을 것 처럼 보였다. 다른 세 명의 선원들은 깊은 고민 끝에 바닷물을 마신 선원을 희생시켜 그의 고기와 피를 마시고 연명하며 버텼다. 그리고 그들은 마침내 구조 되었다. 생존자들은 본국으로 회송되어 재판에 회부되었다. 그들은 어쩔 수 없었다고 주장했다. 어차피 곧 죽을 사람을 희생하여 세명이 살아 남는게 옳지 않느냐고.

 

위 이야기에서 생존한 사람들의 살인 및 식인 행위에 대한 비판은 두 가지의 상반된 시각에서의 정의관으로 나뉜다. 첫번째 시선은 행위 자체에 거부감을 느끼는 시각. 인도적인 측면에서 심히 벗어난 행동이라는 시각이다. 두번째는 이 사건이 추후 사회 전체에 끼치게 될 영향이 득보다(생존자들이 살아남은 것보다) 실이 많다는 시각이다.(살인의 기준 약화, 식인에 대해 관용적으로 바뀔 사회의 시선) 결과론과 과정론의 관점 차이이며, 트롤리 사고실험과 결을 같이하는 예시이다.

 

 

제러미 벤담의 공리주의

벤담의 이론은 이러하다. 우리는 누구나 쾌락을 좋아하고 고통을 싫어한다. 쾌락과 고통은 우리 삶에 항상 수반된다. 와중 쾌락이 고통보다 높은 상황에서 우리는 행복하다고 느낀다. 그러한 행복이 공동체 집단에게 극대화된 사회가 비로소 정의로운 사회라고 이야기한다. 벤담의 이론은 오늘날의 보편적 인권의 개념을 철저히 거부한다. 공동체 집단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개인의 권리는 아무래도 좋다는 입장이다. 

 

 

 

구빈원

벤담은 극빈원이라는 아이디어를 제시한다. 시민들은 길을 지나다 거지를 마주쳤을 때, 불쾌한 감정을 느끼거나 혹은 동정을 느낀다. 두 감정은 모두 시민들에게 있어서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시민들이 거지를 마주치게 되면 사회의 공리가 줄어든다는 것이다. 따라서, 거지들을 마치 교도소 재소자들처럼 한 곳에 몰아넣음으로써 시민들의 공리를 높이고 동시에 구빈원에 입주한 거지들도 케어함으로써, 거지들의 공리까지 높이면 사회 전체의 공리가 높아질거라는 이야기다. 극빈원 이야기에서 벤담의 철학을 엿볼 수 있고, 샌델은 몇 가지의 근거를 들어 반박한다.

 

개인의 권리 침해

벤담이 주장한 공리주의 논리의 약점은 개인의 권리가 존중되지 않는다. 다수와 소수의 딜레마가 발생했을때,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라는 이념이 제반적이다. 극빈원은 거지들의 의사와 관계없이 거지들을 잡아다 한 곳에 몰아넣는다. 잡혀온 거지 중에서는 구속당하지 않고 자유롭게 살고 싶은 거지도 있기 마련이지만, 그러하다 한들 공리를 위해서 극빈원에 강제로 구속되는 편이 정의롭다고 생각하는 벤담이다. 벤담 이론에서의 개인은 사회를 구성하는 요소일 뿐이지 목적이 되지 않는다.

샌델은 책에서 개인의 권리 침해를 강조하기 위해 여러가지 예시를 든다. 

 

콜로세움 관객들의 즐거움을 위해, 검투사들을 사자의 아가리로 밀어 넣는것이 과연 정의로운 행동일까?

시한 폭탄을 설치한 테러리스트가 있다고 치자. 그를 체포한 후에 고문을 통해 심문하고, 고문의 끝에서도 폭탄 위치를 실토하지 않자, 아무 죄 없는 그의 어린 딸을 잡아다가 고문하는 행동이 정당한가?

샌델은 이와 같은 사례를 들어 벤담의 이론을 반박하고, 이러한 인권 침해가 수반된 정의론을 결코 정의의 기준을 삼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행복"을 판단하는 저울

 

샌델은 가치를 나타내는 단일 통화라는 표현을 썼다. 행복을 판단하려면, 쾌락과 고통을 특정한 기준으로 재야한다. 이때, 모든 도덕문제를 두고 쾌락과 고통으로 측량하려는 행위는 오류를 불러온다. 벤담의 공리주의가 설득력 있게 다가 올 수 있는 이유 중 하나는, 기호를 두고 심판이 아닌 계량을 한다. 그 후 공리에 득이 되는 경우 정의롭다고 믿고, 실이 될 경우 정의롭지 못하다 판단한다. 사람의 목숨과 연관된 문제들 역시도 다른 행복을 재는 저울에 의해 재는 것이 옳은가? 모든 가치를 비용으로 환산할 수 있을까? 죽음이나 신체 훼손을 비용으로 환산한 후에 비용으로 지불하는 식의 거래를 사람들에게 물었을 때,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도 굉장히 많을 것이다. 이러한 부분이 벤담의 공리주의의 사각이라 했다.

 

 

 

존 스튜어트 밀의 공리주의

존 스튜어트 밀은 벤담 이론을 옹호하며 자유를 덧붙인 공리 주의이다. 개인의 권리를 존중하는 것이야 말로 장기적인 관점에서 공리에 이익이 된다는 말이다. 즉 밀의 이론은 개인의 권리와 공리를 분리하지 않는다.

 

밀은 자신의 공리주의를 접한 사람들로부터 다음과 같은 반박에 부딪힌다. 누군가의 권리가 침해 당했을 때, 집단에게 득이 되든, 실이 되든, 침해로 인하여 사회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든지 침해당한 개인에게는 부당한 행위일 뿐이므로 둘은 동일시 되지 않는다는 반박이다. 밀은 이에 이렇게 대답한다. 관례나 관습, 여론을 따라 순응하는 것은 남이 정해 놓은 것을 따라하는 것 뿐이다. 선택이 기여되지 않는 삶에는 발전이 없고, 능력을 최대 발휘 할 수 없으며, 개인에게 일어나는 그런 현상들은 공리를 저하시키게 된다. 이때 '선택'을 하기 위해서는 개개인의 개성이 요구된다.

 

벤담은 쾌락의 질적 차이를 부정했다. 하지만 밀은 쾌락에도 귀천이 있음을 주장했다. 만약 동일한 양의 쾌락을 제공하는 두 가지의 다른 행위가 있지만, 행위에 지불해야 할 기회비용의 차이가 있다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적은 기회비용을 지불할 수 있는 쾌락을 선택할 것이다. 하지만  쾌락 사이에 질적인 차이가 있음을 인정한다면, 높은 기회비용을 지불하는 대신 고급의 질을 가진 쾌락 행위를 택하는 사람도 있다는 사실에 동의할 것이다. 만약 재미의 정도가 똑같다고 가정했을 때, 심슨 시리즈를 시청하는 것과 셰익스피어의 문학을 읽는 행위가 같을까? '뭐가 됐든 즐겁기만하면 그만' 이라는 생각이 보편적으로 옳다면, 나 역시도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기보다는 박태준 만화회사의 웹툰들을 보고 있었을 것 같다.

 

밀은 이러한 생각이 이어져 쾌락의 귀천을 인정한 것 같다. 고급 쾌락을 추구하는 욕구로부터 개성이 발휘되고, 개성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개인의 권리가 존중되어야 한다. 개성이 발휘된 우리 사회는 보다 더 다채롭고 풍족함을 이루어낼 것이며, 이는 곧 공리와 연관된다는 흐름이다. 샌델은 이러한 밀의 주장들이 되레 공리와 무관한 인간의 존엄성과 개성이라는 도덕적 이상을 강조한 꼴이 되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