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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정의란 무엇인가 - 마이클 샌델

[정의란 무엇인가] 8. 누가 어떤 자격을 가졌는가? - 아리스토텔레스

 

 

뇌성마비를 앓고있는 캘리는 학교 치어리더팀에 소속된 인기 있는 치어리더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다소 생소하지만, 미국은 학교 스포츠 문화가 많이 발달 되어있고, 치어리딩 문화 역시 그에 맞추어 상당히 발달 되었다. 치어리더팀에 소속된다는 것은 요새 말로 슈퍼 인싸집단에 소속된다는 의미이다. 캘리는 일반 단원들 처럼 고난이도의 기술을 소화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응원에 있어서 누구보다 진심이었고, 그녀의 치어리딩에 관중들과 선수들은 열광했다. 그러나 일부 단원들과 그들의 부모님들은 캘리의 치어리더 활동에 반대하였다. 응원단장의 아버지는 캘리의 안전문제를 이유로 내세웠지만, 캘리의 어머니는 그들이 캘리가 응원단원으로서 박수갈채를 받는 데에 분노한다고 생각했다.

 

캘리의 사례는 공정성과 분노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캘리의 치어리딩 활동은 공정한가? 공정함의 여부를 판단하려면 치어리더의 본질을 먼저 정의해야한다. 일반학생들이 치어리더팀에 입단하려면 공중제비나 다리찢기 등의 고난이도 기술을 구사해야한다. 그러나 캘리는 장애 때문에 그런 기술들을 구사할 수 없다. 캘리의 활동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생각은 모름지기 치어리더라면 고난이도 기술을 구사해야 치어리더로서의 자격이 있다고 할 것이며, 캘리에 찬성하는 사람들은 치어리더의 본질 자체가 그 말대로 응원이기 때문에 관중을 열광케하는 능력이 있는 캘리를 보고 이미 치어리더의 본질에 충분한 활동을 하고 있기에 캘리의 치어리더 활동이 정당하다고 이야기 할 것이다. 

다음은 분노이다. 응원단장의 아버지는 왜 분노했을까? 유추해보자면 다른 치어리더들이 고난이도 기술을 연습해가며 얻은 슈퍼 인싸의 영광을 공중제비를 돌지못하는 장애인 캘리가 함께 누림으로써 그 영광의 가치가 떨어진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여기서 두 가지 질문인 공정성과 분노의 연관성을 발견할 수 있다. 응원단장의 아버지 시점에서(그의 생각이 옳다 그르다가 골자가 아니니 일단 뒤로하자) 캘리의 응원단 활동은 공정하지 않다. 그리고 그녀가 공정하지 않은 응원단 활동을 하며 얻은 영광에 분노한다. 다시 이야기하면, 자격없는 자가 누리는 영광에 분노한다는 이야기이다. 

 

 

정의, 텔로스, 영광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철학의 핵심은 아래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1. 정의는 목적론에 근거한다. 권리를 정의(define)하려면 문제가 되는 사회적 행위의 '텔로스(telos: 목적, 본질)'를 이해해야 한다.
  2. 정의는 영광을 안겨주는 것이다. 어떤 행위의 텔로스를 고민한다는 것은, 그 행위가 어떤 미덕에 영광과 포상을 안겨줄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떤 것을 두고 정의로운가를 고민할 때는 그것의 텔로스(목적, 본질)를 따져보고, 그 행위가 텔로스에 적합하다 판단되면(미덕), 영광과 포상을 분배한다. 쉽게 말해서 자격있는 사람들에게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주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가 생각하는 정의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최고의 플루트를 분배한다고 했을 때, 이 플루트는 로마제국 황제도 세계 최고의 갑부도 아닌, 최고의 플루트 연주자에게 분배되어야 한다. 플루트의 목적은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최고의 플루트를 소유할 사람은 최고로 플루트를 아름답게 연주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만 한다.

 

과거에는 목적론적인 사고가 동서를 막론하고 흔히 자리잡고 있었다. 불이 위로 솓는 이유는 본래의 자리인 하늘에 닿기 위함이고, 돌이 아래로 떨어지는 이유는 원래 속해 있던 땅에 가까워지기 위함이라 생각했다. 세상에는 이치가 있고, 만물에는 존재이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고 과학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자연현상에 대해 설명이 가능해지면서 과학은 이런 목적론적인 사고와 멀어졌지만, 윤리나 정치에서는 목적론적 추론을 통해 여전히 공부하고 고민할 가치가 있다.

 

 

 

대학의 텔로스

앞서 소수집단우대 정책에서 다뤘던 대학 입학 논란에 대해 다뤘다. 대학에 입학할 권리가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를 쫓다보면 대학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묻게된다. 텔로스는 경우에 따라 명확하지 않으며 논란의 여지가 있다. 대학의 텔로스를 두고 학업 성취와 학술 연구라고 생각하는 이도 있는 반면, 특정한 시민의 목적에 봉사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대학 입학의 기준을 세우기 위해서는 해당 대학의 텔로스부터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회조직의 텔로스를 이성으로 판단할 수 있다고 믿는다. 텔로스는 앞서 언급했듯, 얼마든지 다양한 시각으로 출발해서 다른 결과로 도출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조직이나 행위를 두고 텔로스에 대한 의견은 종종 대립하기 마련이다. 대립이 생겼을때, 사회조직이나 행위의 권위자가 텔로스를 단지 정해버리면 그만인 문제가 아니다. 또한 텔로스는 영원히 불변하는 요소가 아니다. 정의와 권리에 관한 논의는 사회조직의 텔로스에 관한 논의이며, 텔로스를 고민하는 것은 사회조직이 어떠한 영광을 포상할 것인가를 논의하는 것과 맞닿아 있다.

 

최근 우리사회에서 크게 이슈가 되었던 모 여대의 공학전환 반대시위에 대입하여 생각해볼 수 있다. 시위의 방법론적인 문제는 뒤로 제쳐두고, 시위대가 내세우는 반대 이유 중 하나인 설립 이념에 위배된다는 주장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관과도 대립된다. 

해당 대학이 설립될 당시, 여성의 교육권 증진을 목적하였다. 시간은 설립시기로부터 한 세기가 지나서 여성들이 남성의 대학 진학율을 초과하는 시대가 되었다. 해당 대학의 초창기 텔로스에 충분히 도달한 셈이다. 텔로스는 불변하는 요소가 아니기 때문에, 상황과 시대가 변함에 따라 텔로스 역시도 그에 맞추어 변경될 수 있다. 하버드 대학 설립자의 의도 역시도 회중교회 목사 양성이었지만, 현재는 세계 최고 대학의 대명사가 되었다.

 

 

정치의 목적

근대와 고대의 분배 정의에는 시대적인 차이가 있다. 근대의 분배 정의를 토론할 때는 주로 재화 관련된 토론이며, 과거에는 권력과 관련된 분배가 주된 주제였다. 당연하게도 아리스토텔레스는 고대의 인물이기 때문에 권력과 관련된 문제들을 주로 고민했다. 권력의 분배를 논하기 이전에 권력자들의 무대인 정치의 텔로스부터 다뤄야한다. 

텔로스가 다양하게 대립될 수 있다고는 했지만, 어찌됐든 플루트의 텔로스는 연주와 관련이 되어있고, 대학의 텔로스는 교육과 관련이 되어있다. 이처럼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의 텔로스를 사이에 두고 여러 의견이 부딪히더라도 결국엔 시민들의 좋은 삶을 고민하는 것이 교집합된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좋은 삶이라 함은, 사람들이 고유 능력을 개발하고 공동선을 고민하며 공동체 전체의 운명에 대해 고민하는 것을 말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NATO나 FTA 같이 안보나 경제에 치우친 연합을 정치 집단으로는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이 추구하는 안보, 경제 등은 정치 집단으로써의 필요조건이긴 하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민들의 정치 참여가 좋은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라면, 선택이 아닌 필수라고 생각했다. 인간은 정치 집단에서 정치 활동을 할 때야 비로소 인간은 언어라는 특성을 통해 인간의 본성을 발휘할 수 있게 된다. 짐승은 소리를 내어 쾌락과 고통을 소통한다. 하지만 인간은 소리가아닌 말로써 표현한다. 언어를 단지 쾌락과 고통을 표현 하는 수단으로 사용하는 게 아니다. 인간은 언어를 통해 함께 어우러져 정의에 대해 이야기하고, 선과 도덕을 고민한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언어 능력을 발휘하는 곳은 정치 집단이 되는 것이며, 정치 활동 참여를 통해 인간의 본성을 실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정치 활동 또한 행동으로 터득해야한다. 이것은 플루트를 배우는 것과 같다. 플루트 수업을 듣고 연주를 들으며 어느정도는 터득할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 본인이 연주를 해보지 않고서는 플루트 연주자라고 할 수 없다. 정치도 마찬가지로 참여를 통해 터득해야 바람직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노예제 옹호

아리스토텔레스는 노예제를 인정하고 거기에 더해 철학적 정당성까지 부여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노예제가 정당하기 위해서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사회에 "노예"라는 역할이  꼭 필요해야 하고, 누군가 노예로 태어나야 한다. 그가 생각했을때 시민들이 미덕과 선을 고민하는 정치 활동을 해야하는 동안 누군가는 집안 일을 봐야한다. 시민들이 좋은 삶을 고민하는 사회가 정의로운 사회니까. 그래서 노예는 꼭 필요하다고 결론지었다. 그리고 그는 노예가 천성적으로 어울리는 사람이 있다고 믿었다. 물론 강요나 폭력에 의해 노예가 된다면 그것은 부당하다. 하지만 태생부터 '자유인으로 태어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믿듯이, 노예로 태어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 또한 믿었다. 그들은 이성적으로 사고하고 판단하는 능력이 부족하여 차라리 누군가를 주인으로 모시는 편이 본인 삶에도 이로운 사람들이다. 그에 따르면, 이러한 조건들이 충족이 된다면 노예제는 정당하다.

 


고대 정치학자들은 대부분 목적론적 사고를 기반으로 했다. 현대의 우리 시선으로는 어딘가 불편한 사고 방식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개인의 자유와 인간의 존엄성이 중심 되는 교육을 받고 있다. 목적론적 사고는 이에 정면으로 부딪히는 사고 방식이다. 하지만 2천년도 더 된 이론이라고해서 구닥다리 취급을 해서는 안될 것이다. 존엄성과 자유 위주의 교육을 받은 우리도 흔히 가지는 사고 방식이다. 우리는 꾸준히 진보하기를 원한다. 정의가 무엇이 되었든, 각자가 그리는 정의를 향해 나아간다. 정의를 향해 나아간다는 목적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그러한 목적이 없다면 나아간다는 표현을 사용하지도 않을 것이다. 목적이나 목표가 없는 진보는 그저 변화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