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죄와 손해배상
2차 세계대전의 대표적인 전범국인 독일과 일본은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질렀다. 독일 나치는 유대인 강제 수용소를 건설하고 홀로코스트 정책을 시행하여 추산 600만의 유대인들을 학살하였다. 과거 일본에게 식민지배를 당하고, 수많은 자국 여성들을 위안부로 희생 시킬 수 밖에 없었던 뼈 아픈 역사를 떠올리면 한 세기가 지난 지금도 분노가 치밀어오른다. 또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백인들이 아프리카 대륙으로부터 흑인 노예를 데려와 신대륙 개척 시기부터 19세기까지 노동 착취와 차별을 행했다.
중간에 위안부 문제라는 역린이 포함되어 있지만, 객관적이고 이성적으로 사고해보자. 국가는 과거의 잘못을 사죄하고 피해자들에게 배상해야 할까?
본인이 저지르지 않은 과거의 잘못을 오늘날을 살고 있는 시민에게 배상하라고 한다면, 자칫 가혹한 일이 될 수도 있다. 비단 배상뿐 아니라 사죄도 마찬가지다. 미국에서는 과거 흑인 노예제와 관련된 백인들의 사죄와 배상이 지금도 종종 언급되곤 한다. 흑인들은 이런 정책들에 환호하지만, 대부분의 백인들은 이에 반대한다.
'오늘날 미국인 중에 단 1초라도 흑인노예를 소유해본 사람은 없다. 그들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아버지가 한 행동을 들고와서 내게 책임을 묻는다. '
도덕적 개인주의
조상의 잘못을 내가 책임질 수 없다는 의견에 반박을 가하기는 쉽지않다.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벌어진 일은 본인의 의사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 또한 태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당연스럽게 반대의견을 낼 수 조차 없었다. 이런 생각들은 도덕적 개인주의라고 할 수 있다. 도덕적 개인주의는 자유주의적 사고로부터 출발한다.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에 의한 행위만이 도덕적 의무를 다할 책임을 가진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한다. 만약 칸트와 롤스의 철학처럼 개인의 자아와 내가 소속된 집단을 완전히 분리시 한다면, 그들에게 집단 및 과거로부터의 책임을 물을 수 없다.
하지만 태어나면서 자연스레 누리고 있던 혜택들도 동일한 선상에서 이야기할 수 있다. 자신이 태어나기 이전부터 형성된 국가적, 사회적 시스템 차원의 복지와 형법도 나의 선택이 아닌 조상들이 이룩했다. 만약 도덕적 개인주의자들이 조상들이 저지른 잘못에대한 책임이 자신에게는 전혀 없다고 생각한다면, 혜택들 역시도 누릴 권리가 없다.
이야기하는 존재
자신을 자유롭고 독립적인 자아로 여기어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일에는 도덕적으로 구속되지 않는다는 생각은 누구나 찬양하고 옳다고 여기는 도덕적, 정치적, 사회적 의무를 받아들이지 않게 만든다. 자유와 동시에 공동체의 도덕성을 인식하는 것이 공존할 수 있을까.
영국 철학자 매킨타이어는 서사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나는 무엇을 해야하는가?' 이전에 '나는 무슨 이야기의 일부인가?'를 먼저 답할 수 있어야 한다. 가령 서울에서 부산을 차를 타고 내려가야 한다고 하자. 해안도로를 따라 갈지 산길을 타고 넘어갈지 경로를 정해야한다. 도로에 들어서기 전에는 어떤 길이 막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우리는 서울에서 부산을 가는 이야기에서 차를 운전하고 있는 사람이다. 바다를 보고 싶어서 해안도로를 타던지, 산 공기를 마시려 산길을 택하는 경로 설정의 선택은 삶을 해석하는 방식이며, 그 경로가 곧 삶이 되는 것이다. 내가 택한 길이 막힐 것을 알았다면 반대편 길을 택했겠지만 그것은 우리네 삶 처럼 알 수 없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찌됐든 우리는 서울에서 부산을 가야한다는 목표이다.
나는 나 자신임과 동시에 누군가의 아들 혹은 딸, 아버지이자 혹은 어머니, 대한민국 국민, 재직 회사의 사원과 같이 태어남과 동시에 여러 역할이 주어진다. 나에게 이로운 일들은 나의 그러한 역할과 관련된 사람들에게도 이로워야 한다. 우리는 앞서 나열한 소속 공동체로부터 빚과 유산, 그리고 의무와 기대를 물려받는다. 그는 우리가 우리를 둘러싼 이러한 배경을 이해하는 것이 도덕의 출발점이고, 삶에 도덕적 특수성을 부여하는 것이라고 했다.
연대와 소속
자유주의적 사고에 따르면 우리가 짊어져야할 의무는 두 가지이다. 그것은 인간이기에 생기는, 이를테면 남을 해치지 않고, 인간을 존중하는 것과 같은 자연적 의무와 합의를 통해서 생기는 자발적 의무로 나뉜다. 자유주의 개념에 따르면 우리는 모든 사람을 존중해야 하지만, 일정 수준에 다다르면 약속한 것만 지키면 된다. 타인에게 이로운 행동을 할 의무는 없다. 이는 시민의 정치 참여와도 연관된다. 자연적 의무와 자발적 의무만 지킨다면 타인이나 공동체에 이득이 되는 행동을 하지 않더라도 책임을 느낄 필요가 없게된다.
인간을 자발적 존재로 여길 것인지, 아니면 서사적 존재로 여길 것인지 결정 지을 한 가지 방법은 제 3의 범주를 의무로 인정할 것인가를 생각해보는 것이다.
가족의 의무
자신의 엄마와 처음보는 아주머니가 물에 빠졌다. 둘 중 한 명만을 구할 수 있다면, 누구라도 엄마를 구하지 않겠는가? 그가 자신의 어머니를 구했다고해서, 하다못해 사다리 타기라도 했어야 했다며 비난할 사람이 과연 있을까?
이런 보편적인 인식은 가족의 의무에 상호 이익과 합의라는 자유주의 윤리를 초월하는 도덕적 책임이 있음을 말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에티오피아 유대인 구출
1980년 초, 에티오피아에 기근이 발생해 40만명이 옆나라 수단으로 대피하여 난민수용소에서 살았다. 이스라엘은 항공수송 작전을 실행해 에티오피아 유대인들 구출을 시도했다. 외교정치적 이유로 7000명을 구조하는데 그쳤지만, 이스라엘의 유대인 구출작전은 가히 영웅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7000명 만을 구할 수 있는 제한된 상황에서 다른 에티오피아인들은 구출하지 않고 유대인만을 구출했다며 이스라엘 정부를 향해 야유를 보낼 사람이 있을까? 우리나라에서도 한창 논란이 일었지만, 타국의 난민을 수용하는 문제는 적어도 나라로써의 의무를 넘어서는 사안이다. 하지만 자국민이 재난 상황에 처했을때, 국가는 최선을 다해 자국민을 구출할 의무가 있다. 이러한 사실을 인정한다면, 연대와 소속 의무의 존재를 인정할 것이다.
위에 두 가지 사례를 살펴보면 우리에게 연대 의무란 보편화된 생각인 것을 알 수 있다.
연대는 우리 사람만 챙기는 편애인가?
연대 의무를 부정하는 사람들은 애국심이나 가족애와 같은 말로 집단 이기심을 수식하여 포장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연대와 소속의 의무는 집단의 이익을 추구하거나 손해를 최소 시키고자 하는 의지뿐만은 아니다. 연대 의무는 공동체 사람들에 대한 의무도 있지만 공동체가 '역사적으로 책임을 져야하는 사람들'에 대한 의무도 포함하고 있다. 예컨대, 소속 공동체의 역사적 과실을 부끄러워하고 반대로 자랑스러운 역사에 자부심을 가지는 것이다.
연대 의무는 비단 우리 사람만 챙기는 편애는 아닐 것이다. 공동체를 격려하고 지원하는 의무를 지니기도 하지만, 공동체의 잘못과 과실을 바로 잡는 역할을 하는 것도 연대 의무에 포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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